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맞은 두 번째 날.
전날 밤에는 러시아 군인들과 번역기와 바디랭귀지를 총동원해 대화하고,
내 갤럭시 S10 5G로 자기들끼리 셀카까지 찍고 갔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비어 있던 내 맞은편 자리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40~50대로 보이는 러시아 아저씨들이었다.
그런데 이 아저씨들...
자꾸 나한테 뭘 준다.
빵도 주고,
귤도 주고,
치즈도 주고,
급기야 보드카까지 등장했다.
다음 날, 맞은편에 택시기사 아저씨가 왔다
처음 열차에 탔을 때
내 맞은편에는 모녀가 있었다.
모녀가 첫날 저녁에 내린 뒤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다음 날 오전이 되자 새로운 승객이 탔다.
40~50대로 보이는 아저씨였다.
그리고 주변에는 같이 탄
서너 명 정도의 아저씨들이 더 있었다.
이번에는 러시아 택시기사 아저씨들
번역기와 바디랭귀지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저씨들은 택시기사라고 했다.
물론 러시아어를 못하는 내가
모든 대화를 정확하게 이해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횡단열차 생활 2일 차.
전날 군인들과
다.
다다.
만으로도 대화를 해본 사람이다.
이 정도는 어떻게든 된다.
번역기와 바디랭귀지는 또다시 열일 중
처음에는 서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는데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하자
아저씨들이 나를 꽤 챙겨주기 시작했다.
특히...
먹을 것을 엄청 챙겨줬다.
막간 팁!

밥 먹을때는 2층 승객이 내려와서 같이 먹는다!
평소에도 계속 누워있을 수는 없으니 낮에 내가 깨어있을때는 2층 승객도 내려와서 옆에 같이 앉아있는다.
2층 침대가 보통 낮아서 똑바로 앉아있기 힘들기 때문에, 서로 배려해서 낮에는 옆에 같이 앉아있을 수 있도록 해주자!
혼자 여행 온 나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열차 안에서는 내가 준비해온
도시락 라면 같은 걸 먹으면서 지냈다.
그런데 맞은편에 아저씨들이 오고 난 뒤부터
내 식탁이 점점 풍성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개 정도였는데...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뭐가 엄청 많아졌다ㅋㅋㅋ
빵도 주고, 귤도 주고, 치즈도 주고
아저씨들이 먹던 음식을
나한테도 하나씩 나눠줬다.
빵도 있었고,
귤도 있었고,
치즈도 있었고,
이것저것 계속 먹어보라고 건네줬다.
당시에는 그냥 얻어먹었던 기억만 남아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나 사진을 다시 보니
나 생각보다 많이 얻어먹었네...?
ㅋㅋㅋㅋㅋ
혼자 여행하고 있는 어린 동양인 여자애가
아무래도 신경 쓰였던 것 같다.
진짜 오이가 들어 있던 오이치즈
그중 아직도 기억나는 음식이 하나 있다.
오이치즈.
오이랑 치즈를 같이 먹었다는 뜻이 아니라
진짜 치즈 안에
오이가 들어 있었다.
처음 보는 음식이라 신기했는데(솔직히 괴식이라고 생각했다)
아저씨들이 이것도 먹어보라고 나눠줬다.
러시아 횡단열차에서
이름도 모르는 음식들을 하나씩 얻어먹는 중.
이런 게 또 기차여행의 재미인가 보다.
그리고 결국 보드카가 등장했다
러시아 아저씨들과 먹을 것을 나눠 먹고 있는데
어느 순간...
보드카가 등장했다.
러시아에 왔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있고,
맞은편에는 러시아 택시기사 아저씨들이 앉아 있고,
테이블에는 보드카가 있다.
갑자기 너무 러시아 같다.
횡단열차에서 얻어마신 보드카 한잔
나도 아주 조금 얻어마셨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작 보드카 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이상하게 선명하게 기억나는 게 있다.
아저씨 얼굴.
술을 드시면서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데
진짜...
새빨갰다ㅋㅋㅋㅋㅋㅋㅋ
보드카보다 아저씨 얼굴색이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내릴때까지 아저씨는 항상 새빨갰다.
이때 배운 만능 러시아어, 하라쇼
그리고 이 아저씨에게
아주 유용한 러시아어 하나를 배웠다.
하라쇼(Хорошо)
좋다, 괜찮다 정도의 뜻인데
이게 진짜 만능이었다.
아저씨가 음식을 건네주고
엄지를 척 올리면서
"하라쇼?" 👍
하고 물어보면
나도 엄지를 척 올리고
"하라쇼!" 👍
하면 된다.
하라쇼? 👍 하라쇼! 👍
맛있어?
하라쇼.
괜찮아?
하라쇼.
좋아?
하라쇼.
뭔가 잘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좋아?
일단 하라쇼.
전날 군인들과 대화할 때
내 러시아어 실력은
다.
다다.
정도였는데
드디어 새로운 단어가 추가됐다.
하라쇼👍
러시아어 실력 +1.
이 정도면 러시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도 조금 생겼다.
그런데 군인들이 다시 나타났다
그렇게 택시기사 아저씨들과 친해져서
먹을 것도 나눠 먹고 잘 지내고 있었는데
전날 만났던 군인들이
가끔 내 자리 쪽으로 지나가며 말을 걸었다.
나는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날에도 같이 이야기했고
나를 괴롭혔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그런데...
맞은편 아저씨의 반응이 달랐다.
갑자기 택시기사 아저씨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내 아래층 자리에 앉아 있었고
택시기사 아저씨는
내 맞은편 아래층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군인은 통로에 서서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택시기사 아저씨가
군인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어를 못하니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몸짓이나 표정, 분위기를 보면
대충
"얘한테 말 걸지 마."
"괴롭히지 마."
이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 안 괴롭힘 당하고 있는데...
문제는 나는 괜찮았다는 것.
군인들이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고
장난도 치긴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괴롭힌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
나 괜찮은데...?
하고 있었다.
그런데 군인과 택시기사 아저씨가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점점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
어.
잠깐만.
왜 분위기가 이렇게 되는 거지?
왜... 싸우시는 거죠...?
군인은 통로에 서 있고,
택시기사 아저씨는 맞은편에 앉아 있고,
나는 그 앞에 앉아 있고.
두 사람은 러시아어로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러시아어를 못한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서 더 무섭다
이게 제일 문제였다.
뭐 때문에 저러는지 알면
차라리 어떻게든 반응이라도 할 텐데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나는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건지,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지,
군인 편을 들어야 하는 건지,
아저씨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내 자리에 얌전히 앉아서 눈치만 봤다;;;;
지금 생각하면
아저씨 입장에서는
혼자 여행하는 어린 외국인 여자애에게 군인들이 계속 말을 거는 게 신경 쓰였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에는
왜 그렇게까지 군인들을 경계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분위기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만 느껴졌다.
그리고 결국...
열차 사무장까지 등장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주변에서도 상황을 신경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결국 열차 사무장이 왔다.
사무장이 군인과 택시기사 아저씨 사이에 들어와
무언가 이야기를 하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나는 여전히
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하면서 상황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었다ㅜㅜ
사무장이 중재하고서야 끝난 상황
사무장이 중재한 뒤
분위기는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군인들이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나한테도
계속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정확한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몸짓과 표정을 보면
"쟤네랑 엮이지 마."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어느새 생겨버린 횡단열차 임시 보호자
왜 아저씨가 군인들을 그렇게 경계했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실제로 군인들이 위험했다거나
무슨 문제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내가 직접 겪은 군인들은
그냥 말을 걸고 장난치던 사람들이었다.
다만 확실한 건
택시기사 아저씨가 나를 정말 많이 챙겨줬다는 것.
먹을 것도 계속 나눠주고,
괜찮냐고 물어봐주고,
누가 말을 걸면 신경 써주고.
어느 순간부터는
횡단열차에서 갑자기 생긴
임시 보호자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열차는 계속 달렸다
열차 안에서 이런저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기차는 계속
이르쿠츠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창밖을 보면 여전히
초록.

초록.

또 초록.

가끔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하루가 끝나갈 무렵 본 일몰
그러다 저녁이 되면
창밖 풍경이 조금 달라졌다.

끝없이 이어지던 초록색 풍경 위로
해가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열차 안에서는 별일이 다 있었는데
창밖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했다.
이 풍경을 보고 있으면
그래도 다시 조금은
내가 정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있구나.
싶었다.
정차역에서도 나는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열차는 중간중간 역에 오래 정차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승객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었고
뭔가를 사오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한번 내려가 볼까...
싶었지만
결국 한 번도 안 내렸다.
내 짐 도둑맞으면 어떡하지?
이유는 단순했다.
무서웠다.
혼자 여행하고 있는데
내 캐리어와 짐을 자리에 두고 밖으로 나갔다가
누가 가져가면 어떡하지?
열차가 갑자기 출발하면 어떡하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다 내려도
나는 혼자 자리에 남아서
짐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 번 정도 내려볼 걸 싶기도 하지만
그때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60시간이 지나자 낭만보다 간절해진 것
처음 횡단열차를 탔을 때는
60시간 동안 뭘 해야 하나 걱정했다.
그런데 막상 타보니
셜록홈즈도 보고,
러시아어도 공부하고,
잠도 자고,
군인 친구들도 만나고,
택시기사 아저씨들에게 음식도 얻어먹고,
보드카도 조금 마시고,
창밖도 구경하고.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래도...
60시간은 길다.
이제 진짜 씻고 싶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점점 간절해지는 건
거창한 게 아니었다.
씻고 싶다.
드라이샴푸고 뭐고
그냥 제대로 씻고 싶다.
그리고 하나 더.
내리고 싶다.
창밖의 초록색 풍경도
이제 충분히 봤다.
셜록홈즈도 충분하다.
열차도 충분하다.
이제 제발...
도착하자.
60시간 7분 만에 이르쿠츠크 도착

그리고 드디어
8월 13일 새벽 3시 7분.
열차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8월 10일 오후 3시
하바롭스크에서 출발했으니
총 60시간 7분.
드디어 끝났다.

8월 10일 오후 3시
하바롭스크에서 출발했으니
총 60시간 7분.
드디어 끝났다.
다, 다다, 하라쇼로 살아남은 60시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 전에는
혼자 3등석에서 60시간이나 보내야 한다는 게
제일 걱정이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가장 기억에 남은 건 불편했던 열차가 아니었다.
말은 하나도 안 통하면서
내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고 간 군인들.
빵이며 귤이며 치즈며
계속 먹을 것을 챙겨주던 택시기사 아저씨들.
그리고 내가 군인들과 엮일까 봐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던 맞은편 아저씨.
러시아어는 거의 못했지만
다.
다다.
그리고
하라쇼👍
이 정도만 알아도
어떻게든 사람들과 웃고 떠들 수 있었다.
결국 기억에 남은 건 사람이었다
60시간 동안 본 풍경은
대부분 초록색이었다.
무슨 나무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열차 안에서 뭘 먹었는지도
하나하나 전부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군인들이 내 폰을 들고 셀카를 찍던 모습과,
택시기사 아저씨의 새빨개진 얼굴,
엄지를 척 올리면서
"하라쇼?"
하고 묻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난다.
아마 내가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될 건
열차 자체보다
그 안에서 우연히 만났던 사람들이 아닐까.
그렇게 60시간의 첫 횡단열차 여행을 끝내고
나는 새벽 3시,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바이칼호를 만나러 갈 차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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